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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의 생각과 글/박용진의 생각

정치후원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8년 대선 당시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했다. 변화와 희망을 상징했고 부시정권 8년에 정내미가 떨어진 미 국민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선거 캠페인을 이어갔다. 막강 화력의 힐러리 클린턴을 당내 경선에서 제압한 그에게 정치자금도 대거 몰려들었다.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정치 후원금의 많은 부분이 소액다수 결제였다는 점이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버락 오바마 후보는 인터넷을 통해 150만 명으로부터 2억65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이 중 무려 47%가 200달러 미만의 소액 후원금이었다. 미 연방의회는 2002년 ‘소프트 머니’(기업이나 단체가 정당에 제공하는 후원금)를 금지하는 매케인-파인골드 법을 통과시켰다. 자본가들이 직접 정치권에 돈을 기부하는 것을 제한하고 일반 시민이 개별 정치인에게 기부할 수 있는 2300달러 이하 ‘하드 머니’만 남겨두었다. 대신에 비영리 비정부기구(NGO)의 창구를 거쳐 무제한으로 기금을 모아 특정 후보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오바마와 본선 경쟁 상대였던 매케인의 개혁적인 법안이 오바마에게는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오바마는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재정적 후원으로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미국 정가에서 흔한 방식의 자금모금 집회 형식이 아닌 웹을 통한 모금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보통 수천 달러에서 수만 달러까지 값이 정해져 있는 유력 정치인과의 저녁식사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해 사진을 찍는 것이 미국의 일반적인 모금 풍토인 것에 비해 오바마의 정치자금 모금은 혁신적이고 대중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모아 놓은 정치 후원금으로 오바마는 정치자금에 쪼들리던 힐러리나 매케인을 경선과정이나 본선과정에서 완전히 압도했다. 특히 본선 마지막 무렵에 슈퍼볼 결승전이 열리는 프라임 시간대 주요 채널을 모조리 사들여 무려 30분 동안이나 정치광고를 내보냈다. 천문학적인 돈이 소요되는 이 광고를 본 사람의 수는 무려 5300만 명이나 되고, 오바마와 부통령 후보인 조 바이든이 대담을 나누는 형식의 이 별 것 없는 정치광고로 공화당의 매케인 캠프는 심리적으로 아예 자포자기 상태로 몰렸다. 기가 질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역시 월가나 유력한 기업의 CEO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오바와는 자신이 두 번째 책 <담대한 희망>에서 정치후원을 당부해야 하는 자리에 가는 것에 대한 껄끄러움을 표현한 적이 있다. 그도 사람인지라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 그것도 ‘한 푼 줍쇼!’ 해야 되는 상황이 누구 못지 않게 싫었던 모양이다.

정치자금에 대해 자유로운 정치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재산이 충분히 정치할 만큼 있는 정몽준, 박근혜 의원 정도가 아니면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이 문제가 만성두통거리이다. 현직 정치인들은 그나마 좀 낫다. 아니 현직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 번 국회의원에 당선되거나 입각했던 정치인의 경우는 주변에 손을 벌리기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나처럼 본격적인 활동을 해보지 못한 ‘예비’ 정치인의 경우가 곤란하다. 자기 재산도 없고, 부모님이 물려줄 것도 없는데 주변에 손을 벌리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손을 벌릴 때 상대편에게 ‘당신이 지금 제법 유력한 사람에게 그럴 듯한 정치적 투자를 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10만원 이하 소액 후원에 대해서는 세액공제를 통해 전액 환급’하는 정치후원금 제도가 있다. 월급쟁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맑은 정치를 만들어 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고 어느 정도 자리도 잡혔다. 세액공제 제도 때문에 아무래도 월급쟁이들이 참여하기가 수월하고 이 때문에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는 정치인들에게는 꽤 힘이 되는 제도이다.



그러나 나는 민주노동당 시절이나, 진보신당 시절에도 이 제도에 기반한 노동조합 측의 지원을 별로 받지 못했다. 민주노총은 자기 노조의 조합원이 아니면 진보정당 후보라도 ‘민주노총 후보’가 아닌 ‘지지후보’로만 규정했다. 민주노총 후보로 지정되면 기탁금을 지원받는 등 금전적인 지원 뿐 아니라 인적이 지원까지 이뤄졌지만 ‘지지후보’는 별다른 지원이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조합원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사실상 아무 사업장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도 되는 ‘일반노조’ 혹은 ‘일용직 노조’의 조합원으로 등록하는 헤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이른바 ‘서류상 노도조합원’인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권유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편법을 쓰면서 지원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지원도 불가능했고 노동운동 출신도 아니어서 아는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는 것도 어려웠다. 내가 구속된 세 번 모두가 민주노총 혹은 노동운동 지원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민주노총의 이런 기준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동운동이 정치운동에서 마저 조합주의 운동으로 가고 있다는 씁쓸한 뒷맛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008년 법으로 정해진 약 1억 5천만원의 정치후원금 한도액의 대부분을 10만 세액공제로 채웠다. 인원수로 치면 약 1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선관위 직원이 제출된 서류의 명부를 보고 혀를 내들렀다는 후문도 들었다. 대부분 주위 지인들이거나 초,중,고, 대학의 동문들이었다. 그만큼 선거운동 시간이 줄었고 그만큼 두루 주변에 민폐를 끼쳤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들에게 민주노동당에서 분당을 하고 진보신당이라는 낯선 정당을 통해 출마하는 당선가능성 zero의 후보를 후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인해본 적이 없다. 그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사의를 표한 적도 없다. 그들의 소리없는 응원이 늘 내게 힘이 되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한다.

이제 다시 총선이 다가왔다. 다시 또 내키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에도 노동조합이나 큰 기업 등의 집단적인 지원과 후원은 기대할 수 없다. 진보정당의 후보가 아니기 때문에 중앙당의 선거자금을 같이 책임져야 하는 분담금의 부담을 갖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선거자금을 고스란히 나 혼자의 힘으로 거둬야 하는 부담감은 예비후보선거운동 시작 한 달을 앞두고 천근만근이다.

2008년, 버락 오바마나 나나 소액다수 방식의 정치후원을 선호하고 실천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변화와 희망을 이야기하고 실천했고, 나는 진보정당 분당과 분열의 한복판에서 아무런 미래지향을 보여주지 못했다.

4년이 흘렀다. 나는 지금 민주진보진영의 분열과 대립을 통합과 연대의 흐름으로 엮어내고, 한나라당 수구세력의 재집권을 막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나의 내년 총선에서의 승리가 민주진보진영의 승리와 맞닿고 대통령선거에서의 승리를 일구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이 지난 20년 간 진보정치의 힘겨운 길을 통해 세상에 제시한 노동존중의 복지국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11월 13일은 19대 총선 예비선거운동 시작 한 달 전이다. 19대 총선일 다섯 달을 앞두고 나의 열정이 나를 돕고자 하는 소중한 분들에게 따뜻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움직일 것이다. 2012년 선거는 희망을 일구는 변화의 거센 바람 맨 앞자락에 박용진이 서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