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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의 생각과 글/박용진의 생각

이제는 노동자가 아니라 정치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

김진숙의 생환(生還)을 생각한다
이제는 노동자가 아니라 정치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

309일만에 내려온 김진숙, "땅 밟게 해줘서 고맙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지난 11월 10일, 무려 309일 동안의 크레인 농성 끝에 무사히 돌아왔다.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85호 크레인을 내려가기 위해서 매일 내려가는 연습을 했다던 그다. 정리해고의 완전한 철회도 아니고 1년 후 재고용이라는 부분적인 승리지만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은 고마운 일이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다 안다.
8년 전 그 크레인에서 ‘황소같은 사내’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 농성 끝에 자살을 하고 시신이 되어 내려왔을 때, 그를 동생처럼 아꼈던 단병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은 85호 크레인 조종석에서 김주익이 농성을 했던 한 평 공간, 그의 시신이 누워 있었던 한 평 공간을 움켜쥐고 대성통곡을 했다. 늙은 노동자 단병호가 ‘주익아, 주익아’ 부르며 목 놓아 울었을 때 이 땅 노동자들과 진보진영은 몸을 떨며 함께 울어야 했다.
지난 겨울, 그의 동지이자 한진중공업의 해고자인 김진숙 지도위원이 몇 년만에 해보는 지 모른다는 통목욕을 하고 85호 크레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무기력한 진보진영과 잔인한 한진 자본에 절망했다.
그런 그가 희망버스와 온 국민의 응원과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왔다. 그의 농성 소식을 전해 듣고 나처럼 불길한 예감을 가졌던 이들 모두에게 김진숙의 귀환은 ‘생환’(生還)이다.

‘골리앗으로부터의 편지’
21년 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자존을 지키고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해서 미포만의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야 했다. 그 때 그들이 지상으로 내려 보내는 ‘골리앗으로부터의 편지’에는 “저 땅위에 내려가 다시 노예처럼 사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죽겠다.”고 써 있었다.

대학 1학년생이었던 나는 그 쪽지에 담긴 한없는 절망과 싸우고, 그 노동자들에게 응원을 보내기 위해서 첫 가두투쟁에 참여했다. 수많은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5.9 민자당 창당일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울산으로 지원투쟁을 나갔다.
21년이 지난 오늘 영도 바닷가에 솟아있는 85호 크레인에서는 김진숙이라는 이름의 노동자가 농성인지 감옥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309일의 지루한 항전을 치러냈다.
그는 종이쪽지가 아닌 트위터를 통해 땅 위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날린 트윗에 담긴 깊은 절망감이 세상에 전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버스’라는 이름의 투쟁에 나섰다.
21년이 지났지만,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절망과 싸우기 위해 크레인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이 땅 노동자들의 처지는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참하고 힘겨운 처지로 몰려 있다.
희망이 있다면 그들이 날리는 쪽지와 트윗에 ‘연대’로 화답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 뿐이다.
언제까지 노동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좀 들어 달라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달라고 말하기 위해 이렇게 크레인에 올라야 하는가? 언제까지 평범한 가장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사회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는 ‘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름이 진보정치든 개혁정치든 그 무엇이든 간에, 노동자들에게 밥이 되고 그늘막이 되어야 하는 정치가 자기 역할을 못하는 현실이 노동자들을 크레인으로 오르게 하고 있고, 목숨을 걸게 하고 있다. 정치가 비루하니 백성의 비참함이 이다지도 극심하다.
모두가 통합정치를 이야기 하고 정권교체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도 절망을 안고 크레인에 올라야 하는 노동자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정권교체는 가짜 정권교체다. 민주정권 10년 동안에도 노동자들은 크레인에 올라야만 했고, 숱한 노동자들이 감옥으로 갔었던 일을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내년 정권교체는 정권의 얼굴을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밑바닥부터 교체하는 진짜 정권교체가 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크레인에 오르는 노동자가 없어야 한다.
그것이 겨우 생환한 김진숙이 다시 목숨을 거는 일이 없게 하는 일이고, 제 2, 제 3의 김진숙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진보정치세력도, 민주정권 10년의 정치세력도 힘을 합쳐 진짜 정권교체를 이뤄내지 못하면 모두가 죄인이 될 것이다. 김진숙의 309일 투쟁과 극적인 생환은 비루한 정치에 내려치는 노동자의 죽비다.
이제는 노동자가 아니라 정치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
박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