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용진의 하루/박용진의 오늘

제자 박용진, 이수호 은사님의 서울교육감 출마기자회견에 다녀오다.





지난 10월 23일 박용진 대변인은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앞에서 있었던 이수호 서울시교육감 예비후보의 출마기자회견 참석하였다.

박용진 대변인과 이수호 후보의 관계는 사회운동 선후배의 관계 이전에 스승과 제자의 연을 먼저 맺었다. 이수호 후보가 전교조 결성으로 징계를 받게 되었던 1989년 당시 신일고에 재학중이던 박 대변인은 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을 모아 징계를 막기도 하였다. 이후 사회운동과 정당활동을 같이 하면서 사제로 동지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아래글은 이수호 선생님이 제자 박용진을 회상하며 쓴 글을 옮겨둔것이다.


-------------------------------------------------------------------------------------------------------------------

용진이

 

용진이는 내 교사시절의 마지막 담임 반 학생이었다. 그러니까 1988년 신일고 2학년 4, 그는 학급 부반장이면서 학생회 간부였다. 밝고 씩씩했으며 자기 주관이 뚜렷했다. 용진이는 학창시절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던 것 같다. 관념적이거나 명분을 앞세워 폼을 잡는 형이 아니라, 현실생활에서 불합리한 것을 어떻게 고치고 어떤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서 실용화하는가, 등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려 애쓰는 형이었다.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개선책을 제시해 교사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당시 교육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때라, 담임으로서 학급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빈자리를 용진이가 채워주어 늘 고마울 뿐이었다.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에 이어 1987 6월 항쟁을 거치며, 교육운동도 엄청난 양적, 질적 팽창을 했는데, YMCA 교사회에서 자주적 교사단체인 전국교사협의회(이하 전교협)로의 발전이 그것이었다. 나는 이 전교협의 사무처장으로, 바깥으로는 교육법 개정투쟁 등으로 전국사업을 이끌며, 안으로는 지역조직을 건설하는 등 조직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1988년 여름에는 여의도 광장에 1만 명 이상의 교사가 모이는 사상 초유의 집회가 열리기도 하고, 치열한 내부 토론을 통해 조직형태를 고민하기도 했다. 당국의 엄청난 탄압이 있었지만 우리는 지혜롭게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학급 경영에 있어서는 최대한의 자율을 보장하는 입장이었다. 담임교사의 비폭력과 학생자율이 만나며, 학급 분위기는 표면적으로는 엉망진창으로 보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반장이 너무 힘들어 한 학기 끝나며 사표를 내기까지 했을까.

그래도 나는 용진이 같은 자주성과 책임감이 강한 학생이 있고, 교사의 학생들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다면 일시적으로는 어려워 보여도 반드시 성공하리라 굳게 믿었다. 학습 분위기도 자유분방해서 교과 담당 교사들의 우려도 있었고, 실제 학급 성적도 떨어지는 것 같았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 1989년 운명의 해가 되었다. 교육운동은 치열한 토론을 거치고 결의를 거쳐, 노동조합으로 가기로 했다. 노동기본권이 헌법에는 보장이 되어 있었지만, 공무원인 교사는 법률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 우리는 법외노조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맨땅에 머리를 받듯 정면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간부인 나는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해직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새 학기 업무 편성에서, 학교에 간곡히 부탁드려 담임에서 빠지게 되었다. 만약 담임을 맡았다가 중도에 해직되면 담임을 바꿔야 되기 때문에, 학생들의 혼란도 막고 충격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내가 신일학교에 근무한 이래 처음으로 담임을 맡지 않는 해가 된 것이다.

예정대로 1989 5 28일 온갖 탄압을 뚫고 전교조는 결성되었고, 나는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때 용진이는 고3이었고 엄청난 입시의 부담을 안고 공부에 매진할 때였다. 그런데 교육민주화를 부르짖는 전교조가 출범하여, 썩어서 고여 있던 교육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자, 뜻 있는 시민이나 학생들은 환영과 함께 지지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신일고도 그런 분위기였는데, 그 중심에 있던 자기 학교 선생님이 구속이 됐으니, 교사들이나 학생들이 술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용진이도 가만있을 리 없었다. 학생회 간부로 전체 학생에 대한 책임도 있었지만, 작년 담임선생님에 대한 의리나 애정도 작용했으리라.

전교조 결성에 대한 지지와 함께, 구속 교사 석방 등 탄압 저지를 위해 학생들이 집단행동을 할 기미를 보이고, 학생운동하는 졸업생들이 찾아와 연대하여 집회 등을 계획하자, 학교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정부 당국으로부터 나에 대한 파면 지시가 내려왔음에도, 학생들의 저항으로 징계위원회를 열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3이었던 용진이는 공부는 일단 뒤로 밀어놓고 선생님 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당시도 교육계의 문제가 많아 전교조 운동이 인정을 받는 분위기였고, 신일고 학생들은 이수호 교사가 학교에서 해직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수한 교사라고 주장하며 징계 철회를 요구했다. 특히 용진이 등은 내가 학생들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비폭력 교사라는 주장을 강하게 했고 이점에 대해서는 학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전교조 결성에 앞장섰던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히 전교조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해직 사유가 된다며, 당시 정원식 교육부 장관은 1500명 이상의 교사를 한꺼번에 목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신일학교만은 학생들이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7월 말 방학할 때까진 징계위원회를 열지도 못하다가 ,방학해서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자 그 때를 이용해 형식적 징계위원회를 열고는, 여름방학 중인 8 9일 자로 나를 파면해 버렸다. 나는 우습게도 그 해6,7월을 감옥에 있으면서도 월급을 타는 교사가 되기도 했다.

그 엉터리 징계위원회를 하면서 당시 교장인 김삼열 선생님이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와서 나에게 하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선생님께서 하신 일이나 선생님께서 신일학교 계시면서 보여준 태도에 대해 우리는 다 이해하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우리 한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로 버티려고도 해봤는데 역부족입니다. 다른 문제까지 들먹이며 괴롭히니 어쩔 수 없네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고 선생님께서 다시 학교로 돌아오시면 그땐 반드시 다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철창 속에서 나는 고마웠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죽 탄압이 심하면 저렇게까지 얘기할까 이해도 되었다. 그러면서 교장의 저런 생각 뒤에는 용진이 등 학생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음을 느꼈다.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다른 선생님을 통해 나는 반드시 돌아갈 테니 내 짐은 잘 싸서 보관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내가 젊은 날 교사를 꿈꾸며 전방에서 깎았던 박달나무몽두리와 함께 지금도 신일학교 어느 구석에 내 짐이 있을 것이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우리는 모두 복직하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레 신일학교에 돌아갈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교사 정원이 넘쳐서 어렵다는 답이었다. 씁쓸했다. 그러나 더 문제 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는 용진이들과 함께했던 그 멋지고 아름다운 신일학교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나는 6개월 만에 출옥해서 전교조로 복귀했다. 한 해가 다 가는 11월 중순이었다. 용진이는 대학 입시를 위해 마지막 땀을 흘릴 때였는데, 12월 어느 날 학교 앞 어디선가 만났던 것 같다. 훌쩍 더 커버린 것 같은 얼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선생님, 얼마나 고생했어요? 미안해요, 저희들이 지켜드리지 못해서...”

나 때문에 너희들이 고생했지. 한참 공부해야 할 때 그 난리를 쳤으니..., 근데 대학은 결정했니?”

용진이는 나와 만난 고2 때부터도 정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진로를 그렇게 잡은 것 같았다.

사회운동이나 정치를 하고 싶은데 제 실력으론 성균관대학교는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느 과를 선택할까 고민 중이어요. 그래서 오늘 선생님 뵈면 의논드리려 했어요.”

그러면서 국문과나 사회학과 중에 갔으면 한다 해서 사회학과를 권했다. 결국 용진이는 사회학과를 지원했고 너끈히 합격했다.

전교조에 복귀해 해직 상태에서 교육운동에 전념하던 나는, 다음해 민자당이 생기고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운동진영이 총 단결하여 민자당일당독재분쇄와 민중생존권쟁취를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이란 조직을 만들었는데 내가 전교조 부위원장으로 전교조의 파견을 받아 그 조직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운동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특유의 성실함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 다음 해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자 나는 그 집행위원장까지 맡아 싸우다가 1992 6 25일 다시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검찰이 내게 씌운 죄목은 어처구니없게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이었다.

나는 스스로 비폭력 평화주의자였기에 이것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국민연합의 집행위원장으로서 조직적 책임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며 반대하는 변호사를 설득하여, 폭력에 대해서도 대응하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폭력을 싫어하는지를 말해 줄 증인이 필요했다. 변호사가 알아보기로 했다.

증인심문의 날이 왔다. 나는 교도관 제자 성규가 다려준 수의를 입고, 두 손에 수갑을 차고, 공안사범임을 구별하는 붉은 포승줄로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재판정으로 갔다. 재판이 진행되고 증인심문을 하는데 용진이가 불려나오는 게 아닌가. 그때 용진이는 대학 3학년,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세상에, 용진이가 내가 비폭력 교사임을 증언하러 법정에 나온 것이다. 나를 힐끗 쳐다보며 씩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대견스러웠다.



변호사나 검사의 심문에 용진이는 그렇게 당당하고 분명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주시면서도 책임에 대해서는 엄격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체벌은 없었고, 사소한 일에 간섭하거나 잔소리 같은 것도 안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장난꾸러기가 아주 그럴듯하게 만든 장난감 권총을 가지고 와서 그걸 친구에게 겨누고 놀다가 선생님께 걸렸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야단치시는 것은 처음 봤어요. 아무리 장난이라도 남을 준이는 그런 것은 용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내 기억에는 없는 얘기를 용진이는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강경대 사태와 관련된 재판은 상당히 주목을 받는 재판으로, 당시 분위기로 봐서 증인으로 나서는 것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땅한 증인을 구하기도 힘든 때였다. 특히 학생으로서는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의 그 잘 생기고 멋진, 그리고 마음이 너무도 맑고 고결한 용진이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용진이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후기)

그 뒤 용진이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졸업 후에는 전국연합에 들어가 연합운동에 온 몸을 바치더니, 민주노동당이 건설되자 당으로 가서 지역과 생활 중심의 진보정치에 헌신했다. 2008년 분당 사태 때 진보신당을 택했는데 뒤에 다시 통합운동에 앞장섰다가 뜻한 바 있어 통합민주당으로 합류하여 대변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명절 때는 친구들과 꼭 인사도 오고, 가끔 정치적 판단이 필요할 때는 나를 찾아 의논하기도 하는데, 내가 명확한 길을 제시하며 도움을 줘야 되는데, 그러지 못해 늘 미안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용진이의 최종 판단을 언제나 존중한다. 그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가 같이 귀하게 여겼던, 자주적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분당사태 때 용진이는 민주노동당을 떠나게 되었고, 나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다시 민주노동당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그때 나는 용진이에게 편지 한 통을 썼는데 참고로 여기 덧붙인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니?

                                     --  제자 용진이에게

 

오늘은 3 16

문래동 당사 창에 와서 부딪히는 오후의 봄볕이 참 따사롭구나

오늘이 일요일인데도

아침부터 회의다 인터뷰다 뭐다하며 시달리다가

오후에는 민심대장정 출정식 겸해서

구로시장을 한 바퀴 돌고 왔는데

아직도 그런 일들이 몸에 맞지 않아서인지

피곤하기만하다

봄볕에 몸을 맡기고 잠시 눈을 감으니

불현듯 네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참 잘생긴 용진아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지금 이 시간 열리고 있는

진보신당 창당대회에 참가하고 있니?

아마 너의 그 멋진 말솜씨로

사회를 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용진아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니?

네가 떠난 당사에는 내가 들어와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고

너는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났으니

왜 우리가 이렇게 다른 곳에 있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없구나

오늘 거기 진보신당 창당 선언문에서 밝힌

불안과 절망의 시대가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고 있지만

소통과 성찰, 혁신의 실패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라는 반성이

어찌 어느 한쪽의 일이며

이명박정부의 폭주와 신자유주의 야당에 맞서

진보진영의 폭넓은 연대전선으로

18대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

는 각오가

어찌 어느 일방의 일이냐를 묻고 싶구나

이런 종류의 내용이

민주노동당의 여러 행사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으니

왜 우리는 같은 말을 다른 곳에서 따로 해야 되는지

정말 기가 막힐 뿐이다

 

용진아

너를 생각하면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1988년 네가 신일고 2학년일 때

나는 너의 담임이었고

그리고 그 다음 해 내가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되었으니

결국 나의 교단생활에서 너는

내가 마지막 담임한 학생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특별했었지

모든 일에 적극적이며

특히 학급이나 학교 전체 일에 관심이 많아

학생회 간부 일을 열심히 했지

자신보다는 남과 전체를 위해 애쓰는 너를 보며

앞으로 정치를 하면 참 좋은 일꾼이 되겠구나

혼자 속으로 생각하곤 했단다

그 다음해 너는 고3이어서

입시 준비하느라 다른 일을 곁눈질하기 어려운 때였는데

전교조 문제가 터지고 내가 구속되면서

파면 위기에 몰리자

너는 앞장서서 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얘기를 뒤에 전해 듣고

얼마나 미덥고 고마웠든지

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너는 진로를 걱정하며 대학의 과 선택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둘이 같이 의논해서 사회학과를 택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 한 것 같구나

 

너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는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지고

1991년 국민연합 집행위원장으로 싸우다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네가

나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었지

폭력범으로 몰린 나를 위해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얼마나 폭력을 증오했는가를

너는 나도 기억 못하는 사례를 들어가며

증언을 했었지

사실 증언의 내용도 중요했지만

그때의 그 엄혹한 상황에서

반정부 반체제 인사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는 그 자체가

너무도 힘든 일이었지

그런데도 넌 날 위해 당당하게 증인으로 나왔었다

그것도 학생의 몸으로 

용진아

네가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노태우정권 사법부는

아이들의 어떤 체벌도 폭력이라고 거부했던 나를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등을 적용하여

징역 2 6개월 실형을 선고했으니

그때의 분위기를 알 것 같구나

그렇게 해서 나는 진주교도소로 징역을 살러 떠나고

너는 학생운동을 시작해 총학생회장까지 되었으니

너의 어려움 또한 얼마나 컸겠니

수배는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은 또 감옥행이었으니

너와 나의 운명은 나이와 분야의 차이는 있었지만

우리 사회를 민주화시켜 바로 세워보려는 일념은 같았구나

그렇게 너와 나는 우리가 되어

비록 사제지간으로 나이 차이도 많았지만

같은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동지가 되었지

그래 너와 내가 그렇게 동지가 되면서

난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은근히 널 자랑하고 다녔고

너도 나를 그렇게 봐주는 것 같아

한없이 기뻤단다

그 뒤 나는 나대로 전교조를 중심으로 교육운동을 계속했고

너는 너대로 학교를 졸업하고 전국연합 일꾼으로

본격적인 운동가로 발전했지

너의 그 넉넉함과 뛰어난 역량은

언제나 네가 있는 자리를 빛나게 했고

너를 아끼며 바라보는 우리의 희망이었지

너 같은 후배, 아니 젊은 동지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가슴 벅찬 일이었던지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멋진 친구를 잘 키워 지도자로 자라게 하는 일이

내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했단다

 

용진아

그런 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너는 참 멋지게 자라주었다

궂은 일 마다 않고 험한 자리만 찾아가는 너였지만

언제나 운동의 원칙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넉넉하게 견지했었지

유일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으로 자리를 옮겨

진보정치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주 당연하고 올바른 선택이었다

제대로 된 젊은 정치지도자의 탄생을 바라보는

나의 기쁨 또한 얼마나 컸겠니

너는 당 활동을 하면서도 가장 모범이었다

네가 태어나 살아왔던 너의 동네에 뿌리를 내리고

조급하지 않고 꾸준히 밭을 일구어가는 너의 모습은

국민을 주인으로 알고 그들을 정치의 주인으로 세우는

풀뿌리민주주의의 모범을 보는 듯했지

그러면서도 당내에서는

젊은 나이에 대변인까지 맡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니

얼마나 멋진 일이냐

그러면서도 너는 몸을 아끼지 않고

늘 투쟁의 앞장에 섰다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또 감옥을 갔으니

얼마나 화가 나고 답답했겠니

그런데도 너는 그 어려움을 넉넉하게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니

그게 바로 너의 실력이 아니겠니

네가 감옥에 있을 때 너의 지역위원회가 오히려

너를 중심으로 더 단결하며 당원을 늘렸던 일은

너의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던 일이었지

 

그런데 용진아

너를 비롯한 우리 당원들의 뜨거운 노력으로

지난 총선에서 무려 10석이나 국회의원을 내면서

당은 오히려 속으로 멍들고 어려워지기 시작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정파 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심해지고

성과를 당원이나 국민에게 돌리기는커녕

자신의 인기와 명망성을 높이기에 급급했으니

어찌 당이 조용할 리 있겠니

지난 대선 기간에 보여준

당의 여러 정파의 대립이나

지도급 인사들의 행태는

진정한 진보정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

그 기간 동안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노무현 세력의 몰락과 한나라당의 독주가 요구하는

보수 대 진보의 정치 구도를 만들기 위해

그래서 우리 민주노동당이 주동이 되는 진보진영이

진짜 야당이 되는 정치현실을 실현시키기 위해

진보대연합 운동을 펼친 건

너도 잘 아는 일이 아니니

우리 민주노동당이 이렇게 처참하게 쪼개지지 않고

더 큰 하나로 뭉쳐만 있었더라면

지금 조성되고 있는 정치정세에 비추어보면

이명박 폭주정권의 확실한 견제세력으로

국민들은 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의 당선을 포함해서

20석 이상은 확실히 확보하는 건데

그 모두가 물거품으로 날아가 버렸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니

모두가 우리의 부족이요 못난 탓인 것을

 

그러나 용진아

너는 꼭 성공해야한다

아니 꼭 성공할 수 있다

오늘도 너는 성공하고 있다

대선 기간 동안 너는

우리가 우리의 절차에 따라 뽑은 대통령 후보를

최선을 다해 당선시키기 위해

후보 대변인으로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왠지 흔쾌하지 않았다

언제나 줄서기를 강요하는 그놈의 정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괴로워해야 했으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이니

선거가 끝나자 말자 너는 바로 너의 지역구로 달려가

이른 아침부터 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했지

그렇게 뛰면서 나에게

후원회의 책임을 맡아달라는 부탁에

기쁜 마음으로 수락한 것은

이제 지역으로 돌아가 오로지 주민들을 위한 진정한 정치를 하는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 아니겠니

 

용진아

그런데 이게 웬 청천벽력이냐

대선 패배의 올바른 평가도 나오기 전

어처구니없는 종북주의 논란이 벌어지더니

결국은 탈당사태로까지 치달아

결국 당이 두 개로 쪼개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침몰하는 배를 그냥 구경하고만 있을 수가 없어

무조건 배에 뛰어오른 것은 그 배의 주인이 바로

나였다는 깨달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만든 배인데

그냥 떠내려가게 내버려둘 수 있겠니

그러면서 정신을 좀 차리고 살펴보니

너는 이미 배를 내린 뒤구나

그러나 너는 아주 어려운 순간에도 내게 연락을 해

너의 결심을 얘기했고

나는 안타까우면서도 그냥 듣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미웠지만 어찌 하겠니

너는 이미 나보다 더 커버린 것을

결국 지금까지 언제나 함께 있던 너와 내가

이렇게 갈라져 따로 있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일이냐

탈당 이후에 너는 새로운 당에서

다시 한 번 총선 후보 선출대회를 하면서

연락은 드려야 될 것 같다며 전화를 걸었을 때

간다고도 못간다고도 못하며 주저하는 나에게

선생님 오시지 않아도 돼요

라고 말하는 너의 그 마음이

나보다도 얼마나 더 아플까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해 와서

그래 알았다 행사 잘 치르라며 얼버무리며

얼른 전화를 끊어야 했던 그 일을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니

 

용진아

우리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자

너와 내가 당분간 좀 떨어져 있지만

결국 그게 어디겠니

독점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저지전선에

비정규직을 없애고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전선에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는 전선에

노동자 농민 등 서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전선에

생태 환경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보호하고 함께하는

새로운 진보의 가치를 확보하는 전선에

우리가 같이 서 있는 게 아니겠니

그래서 한나라 이명박의 폭주를 막고

민생을 돌보는 일을 함께 해야 하지 않겠니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니

그러니 우리 서로 멀리 있다 생각 말고

언제나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자꾸나

네가 어디에 있든 어떤 처지에 있든 무얼 하든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너의 곁에 너와 함께 있을 테니

너도 그렇게 하렴

 

용진아

오늘 내 마음이 너무 아파

횡설수설 말이 길어졌구나

용서해라

그리고 총선 끝나고 좋은 성과 가지고

늘 같이 찾아오는 너희 동기 놈들하고

기분 좋게 한 잔 하자꾸나

애기 엄마도 몹시 힘들겠구나

지금도 잘 하지만 더 잘 해라

어느 사이에 밤이 되었네

이 밤이 지나면 또 반드시 새날은 오리니

우리 그 희망 버리지 말고

끝까지 함께 가자

 

          2008 3 16일 늦은 밤

                 언제나 네 앞에서 부끄러운  물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