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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은

박용진을 소개합니다.

박용진


1971년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태어났다.


전주 진북초등학교
에 입학 당시 천막교실에서 생활해야 할 만큼 아이들이 많았던 71년 돼지띠이다.


1979년 서울
로 전학 왔다. 강북구 미아3동 122-8 주소에서 화계초등학교,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다녔고, 2010년 분가할 때까지 무려 31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94년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북부총련 의장까지 역임했다. 서울지하철 파업에 연대활동을 전개하다 구속되었다.


1997년 군을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했으며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위원장과 대선을 치렀다.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했고, 첫 국회의원 출마. 서울 강북(을) 지역구에서 13.3% 거둬 당시 나름의 파란을 일으켰다. 그 여세를 몰아 치열한 경선을 뚫고 지금의 최고위원 격인 전국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2001년 3월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민중대회에서 연설을 했다. 그날 구속되어 2년 1개월을 꼬박 징역살이를 한 뒤 2003년 4월에 출소했다.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아내가 꽃을 들고 의정부 교도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2004년 정부가 복권시켜주지 않아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지만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의 대변인이 되었다. 2007년 대선까지 그 역할을 계속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분당되었다. 진보신당 후보로 서울 강북(을)에 두번째 출마했다. 민주노동당에서도 후보를 내서 볼쌍사나운 경쟁구도가 만들어졌다. 11.8%를 득표했다.



2010년 진보신당의 부대표가 되었다. 3기 지도부 중 유일하게 통합정치를 주장하는 대표단이었다. 야권대통합의 주장에 동의했다. 진보신당 안팎에서 격려와 비판이 동시에 쏟아졌다.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으로 합류했다. <시민통합당> 지도위원으로 창당에 함께했다. <시민통합당>이 <민주당>과 통합해서 만든 민주통합당에서 진보의 깃발을 들고 최고위원 선거에 나섰다. 민주와 진보의 야권대통합 가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