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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은

박용진의 어제와 오늘


- 어린시절

 

1971년 4월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에서 경찰공무원이던 아버지 박구희(1941년 장수군 출생), 어머니 송복순(1943년 장수군 출생) 사이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수군은 그의 가계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선산도 그곳에 있다.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전주 태평동으로 이사를 왔고 그 곳에서 진북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전주시 예수병원, 전주천 일대가 그의 어린시절 놀이터였다.




- 학창시절

  부친의 근무지가 서울로 변경된 후 그는 현재 서울 강북구 소재의 화계초등학교로 전학

오고 그곳에서 졸업했다.(당시 행정구역은 도봉구) 5학년 때까지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학생들이 직접 학급 반장을 뽑는 직선제가 실시된 직후 처음으로 학생임원이라는 걸 해본다. 이후 신일중, 신일고를 다니며 학생회 자치활동에 적극적이었고 고등학교 학생회 부학생회장으로 출마해 당선된다. 그가 고3이었던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그의 고2 시절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수호 선생이 결성 주도 인물로 구속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박용진은 학교 동기생들과 교내시위를 주도한다. 고등학교 내내 87년 6월 항쟁이후 분출한 정치 사회 민주화 흐름에 민감한 시절을 보냈다.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학년 때이던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에 대한 경찰의 타살을 계기로 시작된 5월정국의 말미에 그의 대학선배인 김귀정 양이 시위도중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용진은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으로 찾아간 뒤 장례가 마무리 될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 그때 경험이 많은 충격과 고민을 남겼다. 1994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그 해 6월 벌어진 전국철도기관사협의회와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연대파업을 지원하던 도중 구속되어 첫 번째 감옥생활을 경험한다. 100여일의 수감생활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총학생회장 임기를 마치고 12월 군입대했다. 1997년 2월 부산의 53사단 해안레이다 기지에서 병장으로 제대했다.


- 사회운동

  1997년 마지막 한 학기를 마치기 위해 복학한 뒤 [김귀정추모사업회] 사무국장 활동을 전개했다. 졸업 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정치부장으로 일한다. 그 해 말 있었던 대통령선거를 진보진영 독자후보로 치러내겠다는 계획을 가졌다. 1997년 9월 결성된 [국민승리21]에 전국연합에서 파견되어 대변인실 언론부장으로 일했다. 대선을 마친뒤 전국연합을 그만두고 권영길 당시 대선후보를 따라 진보정당 결성의 길에 나섰다. [국민승리21]에서 언론부장, 조직부장, 기획부장, 청년사업부장, 청년실업대책본부 상황실장, 대표 수행비서 등 온갖 직책을 겸직하며 진보정당 건설에 힘썼고 마침내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2000년 l월 문화일보가 선정한 [차세대 리더 100人]으로 선정되었다.


- 진보정당활동

  민주노동당 창당 직후인 2000년 4월 16대 총선에 서울 강북(을) 선거에 만 29의 나이로 도전했다. 13.3%의 득표율로 7명의 후보자 중 3위. 민주노동당 서울출마자 중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치열한 경선을 뚫고 지금의 최고위원 격인 전국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노동운동을 대표하던 정윤광 전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과 지금은 고인이 된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그의 경쟁상대였다. 그의 총선 결과와 당선은 당내 파란을 일으켰다. 2001년 3월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전국민중대회’에 참여했다 구속되었다. 그로부터 2년 1개월 후 노무현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 사면으로 풀려났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복권시켜주지 않아 2004년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지만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에 성공했고 원내 3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총선이 끝난 한 달 뒤 그는 복권되어 피선거권을 회복했다. 그때부터 2007년 12월 대선 선대위 대변인까지 중앙당에서 활동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에 반대했지만 진보신당이 결성되자 그 후보로 서울 강북(을)에 출마해 11.8%를 득표했다. 민주노동당이 같은 지역구로 후보를 출마시켰다. 2010년 진보신당의 부대표로 출마했다. 3기 진보신당 지도부 중 유일하게 야권대통합에 동의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재통합을 뛰어넘는 야권전체의 질서재편을 이야기 한 것이다. 진보신당 안팎에서 격려와 비판이 쏟아졌다.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최종 거부한 뒤 당을 탈당했지만, ‘민주노동당-노회찬 심상정 등의 진보신당 탈당파-국민참여당’ 등이 참여해 결성한 통합진보당 동참을 거부했다.


- 야권통합운동과 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활동


  진보신당 탈당 뒤 문성근 등이 주도하는 ‘국민의 명령’ 운동에 함께하고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으로 야권통합운동에 합류했다. [혁신과통합]이 결성한 [시민통합당] 지도위원으로 창당에 함께했다. 시민통합당이 민주당과 통합해 만든 [민주통합당]에서 진보의 깃발을 들고 최고위원 선거에 도전해 예상을 뒤집고 컷오프를 통과해 전국을 돌며 정치혁신과 정권교체를 주창했지만 최고위원 당선에는 실패했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서울 강북(을) 공천을 신청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막 통합에 참여한 외부인물이 기존 세력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경선 직후 민주통합당 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4번의 지도부 교체 중에도 대변인 역할을 계속 수행해 8명의 당대표와 함께 했다. 2014년 1월부터 중앙당 홍보위원장을 맡아 기존 민주당과 안철수 대표의 새정치연합이 통합한 [새정치민주연합]의 홍보위원장으로 계속 활동중이다.


- 사회활동

  2011년 7월 서울 강북구에서 청소년여성문화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강북마을학교]를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민주의 연구와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복지국가진보정치연대]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에서 진보정치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저서

[과감한전환](2012. 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