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장인어른은 감옥 간 사위가 미국으로 유학간 줄 아셨는데...



박카스를 사랑하셨던 장인어른, 구속된 사위 미국유학간 줄 알고

나는 2001년 3월 31일 세 번째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대우자동차에 몰아닥친 정리해고를 반대하고, 김대중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강북구당원협의회 위원장이었던 나는 지금의 최고위원 격인 민주노동당 전국집행위원이었다. 서울권역 선출과정에서 당시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 출신의 노동운동 대부 정윤광 민주노총 정치위원장과 오랜 진보정치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진보정치연합 출신 이재영 동지를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꺽고 당선됐기 때문에 안팎으로 주목을 받았던 때였다.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첫 민중대회였다.

외자유치를 위해 정리해고 제도를 사회적으로 관철시켜야 했던 정권으로서는 몹시 민감하게 반응했던 집회였다. 나는 방송차에 올랐다가 연설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밀어닥친 체포조에 뒤엉켜 팔이 꺽이고 폭력에 짓이겨 진 채로 체포되었다. 94년 전지협 파업투쟁 지원, 98년 노동자대회 참가 건에 이어 세 번째 구속이었다. 모두 노동문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그 때 우리 부부는 결혼 6개월의 신혼부부였다.


98년 집행유예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려 3년형을 받아들고 감옥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신혼부부에게 이런 생이별이 또 없었다. 가혹한 일이었다. 사십 후반줄에 어린 딸을 얻은 장인어른께서는 이미 거동이 불편했고 판단하는 일도 다른 가족들의 배려가 있어야만 가능했지만 왜 사위가 명절에도 오지 않고 전화한번 하지 않는지 묻지 않으셨을 리 없다.

아내는 장인어른에게 ‘박서방이 당 활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 당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언제 들어오느냐고 물으시면 ‘그곳 공부가 너무 힘들어 들어오지 못한다.’고 “3년공부”를 마치고 나면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나도 힘들었지만, 아내도 못할 짓이었다.

노무현 정권 출범 1년을 맞아 특별사면 되어 출소했다.

처갓집에 인사가니 장모님은 장인어른 몰래 눈물바람이셨다. 몸져 누운 장인어른을 뵈러 안방으로 들어가니 장인어른이 물으셨다.

“그래, 미국생활은 어땠어?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으며 그래 전화 한번을 못했어 이 사람아...”

고개를 모로 돌리고 울었다. 너무 죄송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장인어른은 내가 출소하고 3개월 뒤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도 내가 구속되었던 사실을 알지 못하셨다. 가족 누구도 굳이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인어른의 병석에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박카스가 놓여 있었다. 출소 후 인사를 갔을 때 머리맡에 놓여있는 박카스 박스가 기억난다. 마지막 한달은 아무 음식도 드시지 않고 박카스만 드셨다. 아내는 어릴때부터 장인어른 박카스 심부름을 다녔다고 한다. 집에 다른 건 몰라도 박카스 떨어지는 날은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박카스가 곁을 지켰다.

박카스가 약국만이 아니라 수퍼마켓에서도 팔리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났고, 오늘 보건복지부는 심야·공휴일 의약품 구입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감기약과 해열진통제 등 가정상비약을 약국 이외의 장소에서도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약사법 개정(안)'을 29일부터 오는 8월 18일까지 20일간 입법예고한다고 28일 밝혔다.

지난 주 박카스가 수퍼에서도 판매된다고 뉴스가 나왔을때 나는 장인어른을 생각했다. 박카스 심부름이 너무 싫었다던 아내도 생각했다.

오늘 약사법 개정안 입법예고 뉴스를 들으면서도 나는 이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감옥 간 사위를 미국 유학 간 것으로 알고 돌아가신 평생 노동으로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장인어른을 생각했다. 박카스 뉴스에 장인어른이 생각났고, 장인어른 생각에 진보정당 이름으로 치러온 온갖 어려움도 돌아봤다.


나는 오늘 아침 진보신당 서울시당 당기위원회에 보낼 소명서를 작성했다.


한 페이지가 안 되는 소명서를 쓰는 내내 힘겨웠다.

20년 넘게 진보정치를 해오고, 13년 가까이 당 운동을 해오면서 내 정치적 견해를 방어하기 위해 당기위원회에 보내는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진로를 열기 위해서, 복지국가와 노동존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개혁진영과 진보진영이 통합의 길로 나가는 과감한 결단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왜 정치적 반박의 대상이 아닌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편의 주장을 ‘처벌’을 통해 제어하려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상생과 존중의 논리가 아니라 배제와 억압의 논리이다. 민주주의와 같은 길을 가지 못하는 사고다.

북쪽 출신이셨기 때문에 사위의 진보경력에 대해 영 마뜩치 않아 하셨지만 당에서 미국 유학도 보내주는 걸 보니 괜찮은 곳이라면서 진보정당을 다시 봤다던 장인어른이 오늘 당기위원회에 출석해야 하는 사위의 모습을 보셨다면 뭐라고 했을지 갑자기 궁금했다.


그래도 복지국가와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 진보정치의 오랜 희망은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



헤어졌던 민노-진보 양당의 재통합이 아닌 보수주류 질서를 전복하기 위한 과감한 정치기획에 진보정치가 더 적극적이길 바라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진보와 개혁이 함께 갈 수 있어야 복지국가 건설의 꿈도, 노동존중의 사회를 만드는 꿈도 가능해진다. 10년 뒤 집권할 것이므로 참고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를 목표로 하는 대통합 정당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희망을 말하는 진보정치의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